농협 전산마비 사태로 피해를 본 고객들이 집단으로 소송을 준비하면서 농협측은 피해를 고스란히 부담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처럼 금융 전산피해로 인해 발생하는 손해를 가정할 때 금융당국의 보안규제강화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재난포커스 - 이정직기자(jjlee@di-focus.com)>
농협 전산마비 피해자 집단소송
지난 4월 12일 농협 전산마비 사태로 피해를 본 고객들이 집단소송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지난 5월 4일 금융권 등에 따르면 1600여 명의 회원이 모인 농협 전산장애 피해 카페는 최근 농협을 대상으로 집단소송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이 카페 관계자는 “곧 법무법인을 선정해 피해유형별 기준안 및 접수 방법 등을 회원들에게 별도 공지할 예정”이라면서 “피해자들에게 증거나 증인을 확보해달라고 공지했다”고 밝혔다.
문제는 소송으로 이어질 경우 쟁점은 농협의 귀책사유. 즉 전산망 마비로 인한 피해를 농협 책임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느냐 여부다.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는 “농협이 그동안 어느 정도의 보안대책을 세워뒀고, 보안지침을 잘 준수했는지 또 불가항력적으로 당했는지 아니면 관리소홀의 책임이 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될 것”이라고 전제했다.
그는 이어 “노트북 외부 반출 관리, 서버 비밀번호 관리 상태와 IBM 실책과 농협 조치 여부 등도 세세하게 따져봐야 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결국 이 같은 쟁점은 원고가 재판과정에서 입증해야 할 부분이다. 피해자들은 검찰 수사 결과 시스템 관리용 노트북이 통제 없이 외부로 반출입됐고 매월 바꿔야 할 최고관리자 비밀번호도 1년 가까이 변경되지 않는 등 보안이 허술했던 것으로 드러난 점은 소송 제기시 고객들의 승소 가능성을 높이는 부분이라고 보고 있다.
반면 고객이 피해를 구체적으로 입증하기 어렵고 주된 책임의 소재가 북한의 사이버테러로 지목된 점 등은 농협 측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한편 농협은 자체적으로 민원을 접수해 보상에 나서고 있다. 농협에 따르면 지난 2일 현재 1385건의 피해보상 민원이 접수됐으며, 이 가운데 1361건에 대해서는 피해보상을 끝냈다.
금액으로는 약 2000만원 규모다. 그러나 연체이자 수수료, 세금 지연 납부에 따른 가산세 등 구체적으로 수치가 나오는 부분에 대해서만 보상을 해줘 고객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고객들이 생각하는 피해가 광범위하다는 점은 집단소송에 동력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불필요한 강제 보안기준
이 같이 농협은 전산사고로 고객의 피해를 고스란히 부담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금융당국은 보안규제에도 불구하고 현대캐피탈과 농협 등 최근 금융사를 중심으로 보안사고가 잇따르자 글로벌 기준 금융보안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금융정보 보안전문가들도 높은 보안의식을 바탕으로 한 외국 금융사의 사례를 주목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실제 각국 금융당국은 전자금융거래 확산을 위해 세부적인 규제는 최대한 풀어주되 보안사고가 발생했을 때 해당 기관을 엄격하게 처벌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지난 4월 26일 금융보안연구원이 내놓은 ‘해외 주요국 인터넷뱅킹 현황 보고서’에서 미국, 캐나다, 일본, 멕시코 등 세계 주요 14개국 45개 은행의 보안 현황을 조사한 결과 브라질(2곳), 인도(2곳)를 제외한 나머지 12개 국가 41개 은행에서는 전자금융거래를 할 때 공인인증서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은행 사설인증서를 사용하는 중국 공상은행 등 3곳과 독일 도이체방크 1곳을 포함하더라도 거래시 인증서를 사용하지 않는 곳이 압도적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전자금융거래법을 기반으로 구체화된 규제가 있어서 모든 은행이 동일한 보안기법을 적용하고 있다. 그런데 국내 금융사들이 잇달아 해킹을 당하면서 보안전문가 사이에 이 같은 우리나라 금융당국의 ‘강제적 보안기준’이 문제란 지적이 일고 있다.
외국은 큰 개념에서 보안가이드만 제시하므로 한 국가 내에서도 여러 금융사가 서로 다른 보안기법을 이용한다. 선진국의 감독당국이 가이드라인 위주의 보안사항을 권고하는 것에 비해 우리나라는 과도하게 규제하는데도 오히려 보안이 취약하다는 분석이다. 실제 최근 해킹기술이 발전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기존 인증방식보다는 ‘해킹방지프로그램’ 도입이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까다로운 절차 vs 가벼운 처벌
더욱이 이처럼 까다로운 보안절차에 비해 금융보안 사고가 났을 때 처벌이 너그러운 것은 또 다른 문제로 지적된다. 우리나라는 고객정보가 유출됐을 때 전자금융거래법을 통해 최고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내야 하지만 지금까지 이 같은 과태료 처분을 받은 기관은 없다. 예를 들어 영국 HSBC는 18만명의 고객정보가 평문으로 저장된 CD를 일반우편으로 전송하는 도중 분실한 사고로 인해 영국 금융당국(FSA)으로부터 약 60억원 규모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반면 국민은행에서 마케팅 담당 직원이 e메일을 보내면서 실수로 상품소개 자료 파일 대신 그 상품에 가입된 고객 명단이 저장된 파일을 첨부해 수만명의 고객에게 전송한 사례나, 지난 2009년 국내 모 카드사가 직원용 PC 1400여 대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폐기된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의 고객정보를 빌미로 금품을 요구한 사례가 있지만 금융기관은 처벌받지 않은 것과 대비된다.
실제 이 같은 환경 속에서도 외국계 금융사들의 보안에 대한 인식은 철저해 우리 금융업체들의 실태를 되돌아보게 한다. 국내 보안업계의 한 관계자는 “한국씨티은행을 비롯한 외국계 금융사들은 해외 본사가 보안정책에 사용되는 비용을 책정해 내려보낸다”면서 “그 선을 최대한 유지하는 외국계와 무턱대고 비용을 깎으려는 우리나라 기업과는 확실히 비교된다”고 털어놨다.
‘땜질식’ 보안의식도 문제
전문가들은 모든 네트워크를 막고 필요한 것만 허용하는 ‘차단 기반의 허용정책’을 사용하는 외국 등 글로벌 기업과 달리 우리나라 기업들은 네트워크를 열어놓고 차단할 것만 차단하는 ‘허용 기반의 차단정책’을 주로 사용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보안업체의 또 다른 관계자는 “금융권은 물론 주요 기업에서 사내 보안용으로 메신저나 특정 사이트를 닫아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는다”면서 “삼성전자나 LG전자에서 사내의 모든 PC를 접속자만 쓸 수 있게 해 놓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네트워크 메신저를 막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지만 결국 땜질에 그친다”면서 “보안솔루션을 도입했으니 이 정도면 됐다는 ‘무사안일주의’ 때문에 이런 사고들이 일어난다”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한편 금융감독원의 한 관계자는 “최근 글로벌 정합성에 맞춰 직접적인 규제가 많이 완화됐다”면서 “절차적 보안이 과도하다는 지적에 따라 개인인증제도를 완화하는 등의 개정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인식 고려대 정보보안대학원 교수는 금융시스템 자체가 아예 다른 만큼 외국의 전자금융 규제를 무턱대고 따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보안만 볼 것이 아니라 투자 대비 비용이라는 전체적인 손익 관점에서 피해보상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면서 “외국과 문화가 다른 만큼 이를 똑같이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