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기 | jongkiyoo@deloitte.com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 기업리스크자문본부 이사 업무연속성협회(Business Continuity Institute) 한국대표

지난 2월9일 수도권에서 일어난 리히터 규모 3.0 수준의 지진으로 관계당국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매년 리히터 규모 6.0에서 6.9에 이르는 강진이 평균 134차례, 진도 7.0 이상의 대형 지진이 17차례나 전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데, 이 중 많은 지진이 비록 산간오지나 미개발 지역에서 일어나기는 하지만 일부는 주요한 경제중심지를 강타하기도 한다. 이러한 대형 지진이 경제중심지를 강타할 때는 글로벌 공급체인뿐 아니라 경제, 사회 기반시설의 취약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지진과 같은 대형 충격은 많은 기업들의 비즈니스가 기반시설 연결망에 얼마나 많이 의존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진 발생에 대해 각기 다른 대응을 보인 컴퓨터 제조회사 델과 애플의 사례를 통해 교훈을 얻어보자. 1999년 9월21일 지진이 대만의 하이테크 제조업 중심지 근처를 강타하였다. 리히터 규모 7.6에 이르는 이 지진으로 2300명 이상이 사망했으나, 진앙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80㎞ 가량 떨어진 사이언스 파크에 있는 28개 반도체공장에는 구조적인 손상이 거의 없었다. 비록 이들 공장들 자체는 피해를 면했을 수도 있으나 전기 공급이 거의 24시간 단절되었으며 웨이퍼를 가공하던 장비에 정전이 되었을 때, 수만 장의 웨이퍼가 못쓰게 되었다.

이 웨이퍼들은 컴퓨터, 통신장비, 셋톱박스, 휴대폰 등에 쓰일 것이었는데, 해당 공장들이 모든 정밀 시스템을 정상화하고 이를 재점검하고 지진 이전 수준의 반도체 수율을 얻기까지는 몇 주가 걸렸다. 대만 지진으로 인한 충격은 즉시 이들 반도체 회사들의 고객들에게로 번져나갔는데, 특히 IBM, HP, 델, 지멘스, 후지쯔, 애플 등 수많은 대형 컴퓨터 메이커들에게는 직격탄이었다. PC 생산과 유통의 차질은 최종 고객들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주었는데 영향의 정도는 각 PC 메이커가 자신의 컴퓨터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고객관리를 어떻게 했는지에 따라 매우 달랐다.

애플·델 사례로 본 유연성 문제
델과 애플 모두 메모리칩, 써킷 보드, 랩톱 스크린 등의 재고를 거의 갖고 있지 않고 마지막 순간에 들어오는 부품에 의존하는, 즉 ‘감량생산 시스템(Lean Operation)’에 기반해 온 것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으나 제품의 주문, 판매 및 배급 측면에서 차이가 났다. 애플의 경우, 새로 iBook 컴퓨터와 G4 파워 매킨토시를 선보일 때 7월에 가격과 사양을 공표하고 9월 중순 출하할 예정으로 고객들로부터 사전주문을 받았다.

iBook은 애플의 인기모델인 iMac의 모바일 버전으로써 앞선 스타일과 낮은 가격, 여러 가지 색깔로 디자인되어 있어, 일부의 선도 사용자들이 앞다투어 이 컴퓨터를 살 것으로 예상하고 애플은 시장의 관심을 알아보기 위해 사전주문을 이용했던 것이다. 9월 15일, 첫 출하에 앞서서 16만대 이상의 iBook 주문을 받았는데, 사전주문 받은 iBook 가운데 일부만 출하한 뒤 일주일밖에 되지 않아 바로 운명의 대만 지진으로 생산이 중단되면서 부품공급이 차질을 빚었고, 고객들은 실망한 채 몇 주일씩 더 기다려야 했다.

애플이 더욱 곤경에 빠진 것은 지진과 동시에 또 다른 공급업체의 업무중단으로 그 충격을 추가적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지진이 일어난 바로 그날 애플은 모토롤라가 애플이 막 출시한 고급 데스크톱에 사용하는 가장 빠른 속도의 G4칩들을 필요한 만큼 실어 보내지 못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모토롤라는 IBM으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은 새로운 칩 제조기술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고급 칩들이 부족하게 되었고 애플은 고객들에게 주문한 것보다 속도가 떨어지는 컴퓨터를 보내거나 또는 보다 빠른 칩의 출하시기를 무제한 연기해야 했다.

그런데 애플은 당초 발표된 사양보다 속도가 느리지만 어쨌든 모토롤라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가장 빠른 칩을 넣어서 컴퓨터를 내보내기로 하면서 가격을 낮추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비자들로부터 항의가 빗발치자 겨우 가격을 인하하였다. 이 문제는 1999년 4/4분기로까지 이어졌고, 많은 고객들은 마진이 낮은 컴퓨터를 주문하든지, 아예 주문을 취소하는 쪽을 택했다. 델도 메모리나 랩톱 컴퓨터 스크린과 같은 부품부족 사태를 겪었다.

애플과 마찬가지로 델도 또 다른 공급차질이 생겼기 때문에 대만지진으로 인한 사태가 악화되었다. 하지만 애플에 비하여 델의 판매방식은 공급체인의 일부분으로써 훨씬 더 많은 유연성을 제공했다. 애플이 사전주문에 따라 얽매였던 반면, 델은 이보다 훨씬 짧은 주문-생산-출하 사이클을 갖고 있었다. 애플은 몇 달에 걸친 누적수요가 사전주문에 쌓여 있었던 반면, 델은 통상적으로 3일간의 주문만 가지고 일하기 때문에 특정 모델이나 사양, 그리고 3일분 이상의 가격에 대해서는 얽매이지 않는다.

델은 자기가 얻을 수 있는 부품을 가지고 만들 수 있는 제품만 팔았다. 델의 기본적인 주문생산 모델은 지연된 조립공정으로써 수요예측에 따라 부품을 주문하고 고객의 주문에 맞춰 컴퓨터를 조립한다. 이 같은 공급체인은 델로 하여금 독특한 일상적인 유연성을 제공한다. 델은 웹사이트와 전화를 통하여 고객들과 직접 거래하기 때문에 ‘가진 것을 파는’ 전략을 사용할 수 있다. 델은 쉽게 이윤을 남기면서 공급할 수 있는 사양으로 고객들을 유도했다.

공급이 달리는 부품을 사용하는 사양은 가격을 올리고 부품이 과잉 공급되는 사양은 가격을 낮춘 것이다. 또 일부 인기 있는 사양은 가능한 몇 가지 부품을 모아서 프로모션을 하고 웹사이트에 크게 광고한다. 델의 통상적인 오퍼레이션에는 부품의 공급과 가격, 경쟁사의 가격, 그리고 예상되는 시장상황에 맞추어 지속적인 가격의 조정과 매일 또는 심지어 매시간 단위의 프로모션을 실시하는 것을 포함한다.

유연성 확보 고객관계의 핵심
반면, 애플은 유통업체들과의 계약 및 고객들의 사전주문에 따른 의무가 생김으로써 제품에 대한 수요를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이 제한될 수 있다. 따라서, 애플은 사양과 가격을 자주 바꿀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진 후에 인텔이 생산을 무기한 연기함에 따라 델은 이전의 메모리 표준으로 돌아가 지진으로 타격을 입은 시장으로부터 옛날 기술로 만들어진 메모리칩을 구입했고, 칩 가격의 폭등에도 불구하고,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기본 사양의 메모리 양을 절반으로 줄일 것으로 발표했다.

또 추가로 메모리가 필요한 고객에겐 그만큼 가격을 더 받을 것이라고 했다. 인터넷과 전화를 통해 델은 고객들로 하여금 자신이 만들고 실어 내보낼 수 있는 컴퓨터 사양으로 유도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충격에도 불구하고 델은 시장점유율을 높이고 3/4분기의 순익을 전년대비 41%나 높일 수 있었다. 반면, 애플은 시장을 잃었다.

기업의 대고객 기능(CRM), 특히 영업과 마케팅, 배급, PR 등은 고객과 여러 이해관계자들에게 커뮤니케이션을 유지하고 충격의 와중에서 우선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연성 확보는 고객관계를 보호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델과 애플의 사례에서처럼 효과적인 대응은 예외적인 회복과 강인한 노력에 의하여 고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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