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와 <2012>. 지난해 국내 영화판을 뒤흔들었던 흥행작들이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재난을 소재로 했다는 것으로, 이는 곧 지난해 국내에서 상영된 영화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흥행 성적을 거둔 영화 장르가 재난임을 뜻한다. 특히 <해운대>의 성공은 한국 재난 영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 재난포커스 - 이주현 기자  yijh@di-focus.com >

할리우드에선 수많은 재난 영화가 만들어졌다. <타워링> <타이타닉> <볼케이노> <포세이돈 어드벤처> <트위스터>…. 이루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만큼 재난 영화가 관객들로부터 인기를 끌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재난 영화의 인기 요인은 쉽게 보기 어려운 장관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스펙터클 한 장관을 연출하는 재난 영화는 오래 전부터 영화의 한 갈래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하지만 올해만큼 많은 국내 관객이 재난 영화를 본 경우는 지금까지 없는 듯하다.

	사진1. 지난해 여름 개봉해 1140만 관객을 동원한 <해운대> 사진2. 지난해 11월 신기록을 세운 할리우드 재난블록버스터 <2012>

재난영화 신기원 연 <해운대>
여름 성수기에 개봉한 한국 영화 <해운대>는 개봉 33일만에 1000만 관객을 넘어섰고 결국 약 1140만 관객을 동원해 <괴물>(1320만명) <왕의남자>1230만명) <태극기 휘날리며>(1175만명)에 이어 역대 한국영화 흥행순위에서 4위를 차지했다. 이를 바탕으로 <해운대>는 ‘한국형 재난 블록버스터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았다. 외화 쪽에선 11월12일 개봉한 <2012>가 개봉 첫 주에 국내 관객 163만명을 돌파했다. 이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11월에 개봉한 영화 가운데 최고 기록이라고 한다.

<2012>는 개봉 1달만인 12월13일까지 누적관객수 517만명을 기록했다. 이처럼 재난 영화가 큰 인기를 끌자 젊은층을 중심으로 재난 영화에 관심이 높아졌다. 한 포털사이트에선, “볼만한 재난 영화를 추천해 달라”는 부탁에서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재난 영화는 어떤 작품이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질문이 올라오기도 했다. 특히 <해운대>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한국 재난 영화’에 대해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데, 한국영상자료원을 통해 확인해보니, 국내에서 제작된 재난 영화는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영화 시장 크기에 따른 제작비 문제 탓으로 보인다. 재난 영화 한 작품을 만들려면 ‘큰돈’이 필요하다.

장르 특성상 관객을 끌어 모으려면, ‘스케일’이 커야 하기 때문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재난 영화들이 주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인 이유이기도 하다. 가장 최근에 개봉한 재난 영화인 <2012>도 제작비 2억6000만달러(약 3010억원)를 쏟아 부어 만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다. 그에 비해 <해운대>의 제작비는 할리우드에선 ‘껌값’에 불과한 160억원이다. 국내에선 160억원도 최고 수준이지만 할리우드에서 이 돈으로 재난 영화를 만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따라서 ‘한국 재난 영화’는 편수도 적고, 같은 장르라도 할리우드 영화에 비해 ‘스케일’이 작을 수밖에 없다.

	사진1. 최민수, 차승원, 유지태 등 당대 톱스타들이 출연했던 <리베라메> 사진2. 두 소방대원의 우정을 그린 2000년작 <싸이렌>

한국 최초 재난영화 <생명>
<해운대> 전에 만들어진 ‘한국 재난 영화’엔 어떤 작품들이 있을까. 한국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에 따르면, 장편영화에는 <싸이렌> <리베라메> <생명>이, 단편영화로는 <기념촬영> <가스도시> <길> <지워버리다>가 있다. 이 가운데 <리베라메>와 <싸이렌>은 비교적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2000년에 제작되고 화마와 싸우는 소방대원들의 이야기를 그렸다는 것이다. 최민수, 차승원, 유지태 등이 출연한 <리베라메>나 신현준, 정준호, 장진영 등이 출연한 <싸이렌> 모두 당대 톱스타 배우들이 주연을 맡았지만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도 공통점이라 할 만하다.

두 작품 모두 화재란 재난을 소재로 했으면서도 약간 차이가 있는데, <리베라메>는 소방대원과 방화범의 대결을 다뤘고, <싸이렌>은 두 소방대원의 우정과 사랑을 그렸다. <리베라메>와 <싸이렌>은 지금도 DVD 등으로 다시 볼 수 있지만 나머지 작품들을 다시보기가 쉽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거의 개봉이 안 되는 단편영화를 구한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고, 장편영화 <생명>은 너무 오래 전 작품이기 때문이다.

특히 <생명>은 40년 전인 1969년 제작된 작품으로, ‘천재감독’ ‘영화천재’ 등으로 불린 고 이만희 감독이 만든 ‘한국 최초의 재난 영화’다. 장민호, 남궁원, 허장강 등 당대 유명 배우들이 출연해 석탄을 캐다가 지하 갱도에 고립된 광부를 구출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소개된 <생명>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갱도에서 석탄을 캐던 광부 김창선(장민호)은 갱도가 무너지는 바람에 지하 250미터 지점에 고립된다. 김창선이 전화선을 통해 외부와 소통하며 가까스로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알려지자 언론은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신문사에서 일하던 홍 기자(남궁원)는 이 사건에 흥미를 갖고 선배인 서 기자(허장강)에게 기사화 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지만 서 기자는 시큰둥하다. 그러나 김창선 사건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높아지자 신문사 간부는 홍 기자와 서 기자에게 취재 명령을 내리고, 둘은 함께 탄광으로 향한다. 김창선을 구할 방법을 찾아낸 탄광회사에서는 목숨을 걸고 자원한 광부들을 지하로 내려 보낸다. 이들은 사투 끝에 김창선을 구출한다. 이 영화를 만든 이만희 감독은 1975년 40대에 요절한 영화인이며, 배우 이혜영의 아버지로도 널리 알려졌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만추>(1966)·<삼포가는 길>(1973)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