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대만 정국엔 한바탕 돌풍이 일어났다. 그해 치러진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서 정치신인이나 다름없던 인물이 시장에 당선됐기 때문이다. 현 대만 총통인 마잉주(馬英九)가 그 주인공이다. 마잉주는 2002년 타이베이 시장 재선에 성공했고 2005년 국민당 주석에 올랐다. 그리곤 2008년 제12대 대만 총통 후보로 출마해 경제성장률 6%, 국민소득 3만 달러, 실업률 3% 이하 달성 등 ‘633플랜’을 공약으로 내걸고 서민과 중산층 지지를 바탕으로 220만표 이상 압도적 표차로 상대후보에 앞서며 총통에 당선됐다.

< 재난포커스 - 이주현 기자  yijh@di-focus.com >

대만 국민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마잉주는 지난해부터 지지율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마잉주의 국민당은 선거 때마다 패했고 마잉주의 정치인생도 내리막길을 걸어야 했다. 올해 1월9일 타오위안(桃園)·타이중(臺中)·타이둥(臺東) 3개 현에서 치러진 입법위원(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제1야당인 민진당에 모두 패하며 마잉주 정부에 커다란 타격을 안겼다. 마잉주 대만 총통과 집권 국민당이 선거 때마다 민진당에 패하는 이유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가 재난관리 실패다.

이에 대해 대만 현지 언론을 비롯한 세계 언론들은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지난해 8월 대만을 강타한 태풍 모라꼿에 늑장대처한 게 마잉주가 대만 국민에게 커다란 실망을 안겨주고 마잉주 자신과 국민당에 대한 지지율 하락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한다. 사실 모라꼿이 대만에 상륙할 때까지 마잉주 총통이 정치위기에 처할 것으로 전망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2008년 3월22일 치러진 총통선거에서 압승을 하고 총통에 오른 뒤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는 등 중국과 화해정책을 펴서 대만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대만 국민은 중국과 FTA 타결로 경제 교류가 증대되고 많은 일자리가 생겨날 것으로 기대했다. 나아가 중국과 통일도 가능하다고 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재난 우습게보다가 뒤늦게 사과
하지만 지난해 8월 대만 남부를 강타해 인명피해 500여명과 33억 달러에 달하는 재산피해를 입힌 모라꼿으로 마잉주는 대만 국민으로부터 믿음을 잃고 말았다. 태풍이란 재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같은 자연재난이라도 예측하기 어려운 지진 등과 달리 태풍은 예보가 가능하다. 실시간 경로를 파악해 대처할 수 있는 시간도 벌 수 있다. 그러나 대만 정부는 그렇지 못했다. 태풍이 대만 땅에 상륙할 것으로 미리 예고됐지만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다.

대만 정부는 허둥지둥하다가 모라꼿에 강타당한 뒤에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라꼿이 동남부 지역을 강타해 수많은 국민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에도 마잉주는 실수를 저질렀다. TV 연설을 하며 미리 대피하지 않은 이재민들을 나무란 것이다. 그러나 대만 정부의 재난관리 관계자들은 미리 대피령을 내리지 않았다. 마잉주는 또 대만 정부의 재난관리 능력을 과신해 외국 원조를 받지 않겠다며 재외 공관에 외국 원조를 거절하라는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마잉주는 재난관리에 대한 대만 정부의 무능이 밝혀지고 대외원조 거부 지침이 언론에 공개돼 큰 홍역을 치른 뒤에야 실언에 대해 사과하고 대외원조를 받겠다고 말을 바꿨다. 하지만 이미 시기를 놓쳐서 꼭 필요할 때 다른 나라들로부터 원조를 받지 못했고 원조 규모도 턱 없이 부족했다. 국제 사회에 대한 마잉주의 뒤늦은 구호 요청에 59개국이 물자와 구호 요원을 보냈다. 그런데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은 헬기 한 대를 보냈을 뿐이다. 마잉주 총통뿐 아니라 대만 정부 재난관리 책임자들도 헛발질을 해댔다.

태풍이 휩쓸고 간 뒤 뒤늦게 긴급구호작전을 벌인다면서 모라꼿이 상륙한 대만 남부 지역에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긴급구호작전은 뒤죽박죽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군인들은 홍수로 떠내려간 실종자를 찾는다며 부산을 떨었지만 이미 모든 게 물에 휩쓸린 뒤였다. 게다가 이재민들은 1주일간 식량과 식수를 지원받지 못해 심각한 위기를 겪어야 했다.

재난관리 무능, 돌팔매질까지
미리 예고된 자연재난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대만 정부의 재난관리 능력과 재난을 우습게 보고 실수를 거듭한 마잉주 총통의 오만에 대만 국민은 분노했다. 많은 경호원들을 대동해 철통같은 경호를 받으며 위문한답시고 뒤늦게 재해지역을 찾은 마잉주에게 이재민들은 야유와 삿대질로 화답했다. 대만 언론에 따르면, 마잉주는 재해지역 주민에게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내용의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뿔난 군중들의 야유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또 모라꼿으로 가족을 잃은 한 남성은 마잉주에게 “정부가 무엇을 했느냐?”며 “가족을 살려내라”고 대들었다. 심지어 마잉주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경우도 나왔다. 더구나 모라꼿에 강타당한 대만 남부 농업지대는 마잉주 총통의 정적인 민진당 소속 천수이볜 전 총통의 근거지여서 마잉주에 대한 반발이 심했다. 모라꼿 피해 뒤 남부지역에선 마잉주가 정적의 거점이어서 일부러 늑장대응하고 구호작업도 소홀했다는 소문이 나돌기까지 했다.

성난 민심에 놀란 마잉주는 뒤늦게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고 재난관리 책임자를 경질하는 등 민심을 다독이려 했다. 하지만 민심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일부 전문가들은 2005년 8월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했던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 허술한 재난관리 능력을 드러낸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마잉주를 비교했다. 어떤 교수는 “자연재난에 대처하는 조직도, 능력도 없었다”며 마잉주 정부의 재난관리시스템을 혹평했다.

모라꼿에 대한 늑장대처는 마잉주 자신과 국민당 정부에 대한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대만 유권자들은 선거 때 표로 마잉주와 국민당 정부를 심판했다. 모라꼿 이후 치러진 모든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자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재난관리에 실패한 마잉주 정부에 대한 실망감을 표현한 것이다. 이에 대해 대만에선 ‘마잉주의 정치 생명은 모라꼿 이후 사실상 끝난 거나 마찬가지’란 전망이 나온 지 오래다.

모라꼿 때문에 뜬 차이잉원
‘지는 해’가 있으면 반드시 ‘뜨는 해’도 있는 법. 대만 정가에서 마잉주가 지는 해라면 차이잉원(蔡英文)은 뜨는 해다. 현재 제1야당 주석을 맡고 있는 그는 마잉주와 정반대로 태풍 모라꼿 때문에 지지도가 올라갔다. 차이잉원은 지난해 9월 치러진 입법위원 보궐선거를 비롯해 그는 모라꼿 이후 대만에서 치러진 모든 선거에서 민진당이 집권 국민당에 승리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차기 총통 후보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정치인 차이잉원의 출발은 순탄치 못했다. 여성으로 지난해 5월 민진당 주석에 취임할 때만 해도 차이잉원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 민진당 내 기반이 거의 없고 정치경험이 적었던 탓이다. 더구나 주석 취임 초기에 빚어진 민진당 내분에도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연약한 샤오잉’ ‘실권 없는 공주’라고 비꼬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 지난해 8월 모라꼿 이후 주목을 받으면서 마잉주 총통의 지지율을 앞지르기에 이르렀다.

모라꼿이 대만 남부지역을 강타하자 늑장대응하면서 실수를 연발한 마잉주와 달리 차이잉원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행동에 돌입했다. 재난지역 곳곳을 발로 뛰며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지원했다. 민심이 돌아선 뒤에야 대책을 마련한다고 허둥대며 행정원장 등 재난관리 책임자를 교체해 지지율이 크게 떨어진 마잉주와 비교되는 대목이다. 모라꼿 이후 처음 치러진 지난해 9월 보궐선거에서 차이잉원은 모라꼿으로 믿음을 잃은 마잉주를 겨냥해 이번 선거는 ‘차이잉원에 대한 신임투표, 마잉주에 대한 불신임투표!’라는 도발적인 슬로건을 내걸었다.

태풍 모라꼿 사태 때 보여준 마잉주와 차별성을 강조하는 전략을 쓴 셈이다. 이를 통해 차이잉원은 9월 보궐선거를 민진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이끌었고 대만 정가에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차이잉원의 인기에 대해 언론은 모라꼿 태풍 피해 현장 지원활동을 통해 얻은 대중과 고통을 함께하는 어머니 이미지가 정치가로서 대만 국민에게 믿음을 얻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또 차분하고 온화한 성격과 말과 행동에 꾸밈이 없다는 점도 한몫을 한 것으로 평가한다.

차이잉원에 대한 인기는 그를 ‘작은 용녀’ ‘흰장미’ ‘작은 꽃뿌리’ 등의 애칭으로 불리게 했다. 한때 ‘연약한 샤오잉’ ‘실권 없는 공주’라고 비꼬던 대만 언론도 새로운 애칭을 제목으로 뽑는다. 용궁에 산다는 여신을 뜻하는 용녀(龍女)는 중국 문화권에서 현명한 여성 또는 여성 영웅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한다.

‘재난관리’ 정치인의 중요한 덕목
대표적인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지은 <목민심서>는 백성을 위해 수령(지방관)이 해야 할 일 등을 적은 책으로 유명하다. 전국 각 지방에까지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미치기 어려웠던 조선시대 지방 수령들은 행정뿐 아니라 사법권도 가지고 있는 등 권한이 막강했다. 이 때문에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수령이 부임하는 법(부임 6조)부터 청렴하고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하는 법(율기 6조),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 법(봉공 6조), 백성을 사랑하는 법(애민 6조)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목민심서> ‘애민’편에서 정약용은 노인 봉양, 가난 구제 등과 함께 재난으로부터 백성을 구하는 일을 목민관의 임무로 꼽았다. 조선시대에도 재난관리는 목민관의 반드시 해야 할 중요한 책무였던 것이다. 재난관리는 지방 목민관뿐만 아니라 통치자에게도 중요한 덕목이었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의 경우 한 때 한양(서울)에 화재가 끊이질 않자 “화재를 당한 백성을 조사해 식량을 대주고, 화상을 입은 자는 의원에게 치료하게 하고, 사망자 중에 친족이 없는 자는 관청에서 장사에 쓸 기구를 주어 장사지내게 하라”(1426년 2월16일)고 명을 내렸다.

세종은 또 오늘날 소방방재청이라 할 수 있는 ‘금화도감’을 설치해 화재를 예방하고 불 끄는 일을 전담케 했다. 금화도감은 불을 끄는 일뿐 아니라 방화범을 잡아들이는 권한이 주어졌고, 뒤엔 하천을 관리하는 업무까지 맡기도 했다. 지난해 TV 드라마 주인공으로 그려져 선풍적 인기를 모았던 선덕여왕도 재난관리에 힘을 기울였다. 선덕여왕은 632년 왕에 올라 647년까지 16년간 신라를 다스렸다. 647년은 비담과 염종 일파가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킨 해로 선덕여왕은 정월에 일어난 ‘비담의 난’을 물리치고 8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선덕여왕이 신라를 다스리던 시기에도 각종 재난이 끊이질 않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여왕 원년(632) 5월부터 가물기 시작해 6월이 돼서야 비가 내렸다. 이에 선덕여왕은 10월에 관리를 파견해 홀아비와 과부, 어린 고아, 부양할 자식이 없는 늙은이 등 홀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이들을 위문하고 돕게 했다. 또 633년 2월 서울(경주)에서 지진이 일어났고, 634년 3월에는 밤만한 우박이 내렸다. 이처럼 선덕여왕이 왕에 오른 뒤 몇 년간 해마다 자연재해가 이어졌다. 그 때마다 선덕여왕은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위로하고 구제했다. 633년에는 전해의 가뭄을 이유로 그 해 세금을 면제해주는 등 재난을 당한 백성을 지원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