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많고 탈 많았던 재난안전무선통신망(재난안전통신망) 구축사업이 또 차질을 빚게 됐다. 통신방식(표준기술) 결정이 내년 말로 연기됐기 때문이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2월25일 재난안전통신망 구축사업 방향에 대한 관계기관회의를 개최한 결과 표준운영절차(SOP)를 마련하고 기술검증 과정을 거쳐 내년 11월 통신방식을 결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밝혔다.

< 재난포커스 - 이주현 기자  yijh@di-focus.com >

재난안전통신망은 국가적인 대재난에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 행안부, 소방방재청, 경찰청 등 정부부처와 한국도로공사와 같은 유관기관들의 무선통신망을 하나로 통합하는 사업이다. 담당업무가 서로 다르고 여러 지역에 분산돼 있는 재난관리책임기관과 긴급구조기관들이 재난현장에서 신속·정확한 의사결정, 일사 분란한 구조작업 등이 가능하도록 무선통신망을 통합할 필요가 있다는 요구에 따라 추진됐다.

시범사업→확장사업→보류→연기
재난안전통신망 사업은 ‘통합지휘무선통신망’이란 이름으로 2005년 10월부터 2006년 7월까지 시범사업(사업비 119억원), 2006년 10월부터 2007년 12월까지 1차 확장사업(사업비 353억원)이 진행됐다. 하지만 2008년 3월 재난안전통신망 사업은 보류되고 말았다. 감사원이 2007년 4월부터 감사를 벌여 2008년 2월에 낸 감사결과처분요구서에서 사업추진방식의 적정성, 사업의 경제성, 사업목적 달성 가능성 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기획예산처도 2008년 6월 KDI 용역을 통한 타당성 재조사를 거쳐 경제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정책 타당성도 없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재난안전통신망 구축사업이 보류된 뒤에도 통합망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끊이질 않았다. 사업보류 이후 경찰청, 소방방재청, 도로공사 등 재난관리기관들의 자체 무선통신망 신·증설이 중단된 탓에 꼭 필요함에도 통신망 자체가 없거나 장비가 노후해 국가적인 대재난이 발생할 경우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는 우려 섞인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곧 감사원과 KDI 등이 지적한 ‘경제 논리’는 재난안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과 일맥상통한다. 당장 경제성이 부족하다고 반드시 국가가 맡아야 할 책무인 재난안전을 등한시한다는 건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라는 비판이기도 하다. 또 재난안전통신망을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 예기치 못한 대재난을 맞았을 때 입는 인명과 재산피해는 재난안전통신망 구축·운영에 필요한 사업비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주장하는 재난관리 전문가도 많았다.

행안부도 재난안전통신망 구축 필요성에 공감하여 지난해 8월 재난안전통신선진화추진팀(재난안전통신팀)을 꾸렸다. 재난안전통신팀은 국가 재난안전 통신체계 개선책을 마련하기 위한 태스크포스로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이 수행한 ‘재난안전 무선통신 정책방향 수립을 위한 연구용역’ 등을 거쳐 지난해 말 재난안전망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올해 초에 통신방식을 결정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2월25일 회의 결과 재난안전통신망 사업은 다시 연기되는 처지에 놓였다.

SOP 마련하고 신기술 포함해 결정
앞서 설명한대로 재난안전통신망에 적용할 통신방식을 연기한 것은 2월25일 개최된 ‘재난안전통신망 구축사업 방향에 대한 관계기관회의’에서다. 행안부에 따르면, 강병규 행안부 제2차관 주재로 열린 이날 회의에는 국방부, 방송통신위원회, 경찰청, 소방방재청 등 중앙부처 재난안전통신 관련업무 담당국장과 관계연구기관 원장 등 12개 기관이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선 감사원 등이 지적한 재난안전통신망 사업의 효율성을 높이고 경제성을 확보하기 위해 연계기관 범위를 1441개에서 566개로 축소 조정했다.

또 통신방식 선정에 앞서 내년 11월까지 재난현장에서 재난기관 간 합동대응 절차·방법 등을 명확하게 정립하기 위한 표준운영절차(SOP)를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논란을 빚은 통신방식과 선정 시기에 대해 행안부는 이날 회의에서 제1안과 제2안 2가지 방안을 두고 집중 논의한 결과 제2안을 채택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밝혔다.

이날 회의에서 논의된 제1안은 현재 경찰청과 소방관서 등에서 일부 운영중인 테트라(TETRA) 통신방식으로 선정해 국가 재난대응역량을 조기에 확보하는 방안. 결정된 제2안은 SOP 마련, 재난주파수 확보 등이 가능해지는 2011년 말에 테트라, 아이덴(iDEN)과 함께 와이브로(WiBro), 마넷(MANET) 등 신기술을 포함해 적정성 여부를 검토한 뒤 선정하는 방안이다. 제2안이 결정된 이유는 “재난안전통신망 사업의 선결요건인 재난현장에서 각 기관 간 통신망 SOP 마련, 재난안전통신망을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데 필요한 재난전용 주파수 확보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점 등이 크게 작용했다”고 행안부는 설명했다.

“가능성 열어 두고 철저히 검증하겠다”
재난안전통신망 통신방식 선정이 내년 11월로 연기된 데 대해 행안부 재난안전통신팀 관계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재난안전통신망 구축사업 방향에 대한 관계기관회의에서 논의된 무선통신기술들을 철저히 검증한 뒤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테트라, 아이덴, 와이브로, 마넷 등의 기술발전성과 감사원 등이 지적한 경제성, 기술종속(독점문제) 여부 등도 검증해 결정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재난안전통신팀 관계자도 재난안전통신망 구축사업이 하루 빨리 시작돼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그는 “새로 재난안전통신망을 구축하지 않고 아날로그식 극초단파(UHF) 기술로도 통신할 수 있다”며 “하지만, UHF는 지역적인 무선통신방식으로 불편할 뿐 아니라 통합이 어렵다는 게 문제”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디지털로 바뀐 지 오래된 상황에서 옛날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하면 새로 개발된 좋은 기능을 알면서도 쓰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꼬집었다. 재난안전통신팀은 25일 관계기관회의에서 결정한 것처럼 통신방식 선정에 앞서 SOP를 수립할 예정이다.

유관기관 사이 업무조정 등을 하지 않고 사업을 시작할 경우 빚어질 수 있는 혼란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SOP 수립이 선행돼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재난안전통신팀 쪽은 “전문가에 따라 재난안전통신망 구축·운영에 필요한 SOP 수립에 5년 이상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내년 11월 말까지 마무리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기술검증 계획에 대해선 공인연구기관과 전문가 등의 인증을 거치겠다는 입장이다. 관련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 등을 구성한 뒤 시범사업을 포함해 재난안전통신에 적용된 사례를 중심으로 철저하게 검증하겠다는 게 재난안전통신팀의 계획이다.

재난안전통신망에 적용할 기술을 검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재난통신이 가능한가? 즉 재난안전통신망에 적합한지 여부다. 재난안전통신망은 재난이 발생했을 때 일원화된 지휘체계에 따라 신속하게 대응해야 하는 국가의 책무를 지키는 데 핵심 역할을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재난안전통신망 사업추진계획에 대해 재난안전통신팀 관계자는 “내년 11월까지 SOP를 수립하고, 통신방식을 결정한 뒤 예비타당성 검토를 통해 사업계획을 검증 받아야 재난안전통신망 구축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통신방식 선정이 내년 말로 연기되면서 일부 전문가들은 통신방식 선정 이후에도 2년 이상 시간이 필요하므로 2015년이나 돼야 재난안전통신망 사업이 본격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관련 업계에서는 통신방식 선정 연기가 ‘토종무선통신기술’인 와이브로에 이득이 될 것으로 보는 경향이 우세하다. ‘정부에서 아직 입증되지 않는 와이브로를 염두에 두고 시간을 벌어주려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