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 같은 프로그램으로는 절대로 국민 참여를 이끌어낼 수 없다.” 국내 한 재난관리 전문가는 재난 및 위기 유형에 따라 필요한 조처를 목록으로 만든 매뉴얼로는 예기치 못한 재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매뉴얼 대신 그는 “업무연속성계획(BCP)으로 대표되는 재난관리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 재난포커스 - 이주현 기자 yijh@di-focus.com >
행안부가 지난 4월7일 전국 지자체 재난안전과장들을 소집해 개최한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긴급 점검회의’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있었다. 공사장 사고를 줄이려면 안전점검보다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날 공사장 안전사고 방지대책에 대해 발표한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배계완 건설안전실 국장(국책사업 재해예방 추진단장)은 “공사장 안전점검은 효과가 단기적이므로 항구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선 반드시 자율적 안전관리시스템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1980년대부터 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공사장 재해예방 업무를 해온 배계완 국장은 “20년 넘게 일하면서 무수히 많이 건설공사장 안전점검을 해왔지만, 큰 효과가 있었던 경험은 거의 없다”며 “지금은 교육과 안전관리시스템 도입만이 해결책이라고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대응매뉴얼은 특정 재난만 가능”
앞서 언급한 재난관리 전문가는 2004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에서 만든 매뉴얼을 예로 들며, 위기 유형에 따라 필요한 조처를 설명한 프로그램은 (국민 또는 직원)참여를 유도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NSC 매뉴얼은 2004년 7월12일 제정된 ‘국가위기관리 기본지침’에 따라 유형별 위기관리 활동에 관한 공공기관의 세부 행동요령을 규정한 것이다.
위기관리 표준 매뉴얼과 위기대응 실무 매뉴얼로 나뉜 NSC 매뉴얼은 풍수해를 당했을 때 관련 기관은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지, 고속철도 사고가 났을 때 한국철도공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등을 자세히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겪은 신종 인플루엔자 대유행 같은 상황을 맞으면 ‘답이 없다’는 게 문제다. 예측 가능한 전염병은 매뉴얼로 대처할 수 있으나 신종 플루처럼 예기치 못한 전염병에 대비한 매뉴얼이 없는 탓이다.
실제로 지난해 신종 플루 문제가 불거졌을 때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예측만으로 구체적인 전염병 대응 매뉴얼을 만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었다. 이에 대해 재난관리 전문가는 “매뉴얼 같은 프로그램은 특정한 위기 유형에 대해서만 효과가 있을 뿐”이라며 매뉴얼의 한계를 꼬집었다. 그는 “앞으로 어떤 위기에 부닥칠지 모르는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매뉴얼에 의지한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며 “표준화된 재난관리 시스템 도입만이 해결책”이라고 단언했다.
“재난관리국제표준 도입 필요하다”
이어서 그는 국제표준화기구(ISO)를 통해 제정되고 있는 재난관리(사회안전) 국제표준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제표준은 재난을 예방하고 재난을 당했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제정되는 재난관리 시스템으로, 업무연속성계획의 국제표준에 해당된다. 업무연속성계획은 어떤 재난에 부닥쳐도 한정된 자원으로 중단 없이 조직을 운영하고, 목표한 복구 시간 안에 평상시 업무로 재개하기 위해 미리 수립하는 행동 계획을 이른다.
대상은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 공·사기업 등이다. 업무연속성계획에선 신종 플루처럼 전염성이 매우 강한 질병에 대한 조직운영 대책의 하나로 재택근무·원격회의 등을 권장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직원 중 신종 플루 환자가 발생했던 일부 기업에서 재택근무를 활용했다. 재택근무나 원격회의는 태풍·홍수·지진·폭설 등으로 인해 직원들이 출근하기 어려울 경우에도 조직을 운영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전염병 같은 사회적 재난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자연재해에도 동일하게 적용 가능한 시스템인 셈이다. 따라서 재난관리 국제표준 도입은 곧 효과적인 참여형 재난관리시스템을 갖추는 것과 같다. 그리고 재난관리 분야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도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자체 재난관리 표준을 제정해 운영중인 미국(ANSI/NFPA 1600), 영국(BS 25999) 등이 국제표준 제정에 참여하고 있는 이유다.
재난관리 전문가들은 국제표준을 도입함으로써 참여형 재난관리 능력을 한층 발전시키는 동시에 방재선진국 등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유무형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한 전문가는 크리스터 쿰린 ISO 사회안전총회 의장의 말을 인용해 “국제표준을 도입하지 않으면, 외국에서 구호물자는 지원받겠지만 다른 도움은 절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 말했다. |
yijh@di-focu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