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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정전, 예견된 인재(人災)
“전문가들 재난매뉴얼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2011년 10월 05일 (수) 17:29:37 이정직기자 jjlee@di-focus.com

지난 9월 15일 한반도 전국 곳곳에서 정전 사태가 벌어졌다. 이 정전으로 많은 인명상 재산상피해를 겪으며 적지 않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한전은 비상시 이뤄져야 할 위기관련매뉴얼조차 이번사태로 인해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 것이 여실히 나타났다. 재난전문가들은 이번 사태에 대해 언젠가는 한번 닥칠 수 있는 인재라고 규정하는 등 문제점을 지적했고, 시민단체들도 소송을 불사하겠다는 등 그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글 | 이정직 기자  

   
 
전력거래소 ‘전력시장운영규칙을 어긴 것으로 드러나’

9월 15일 한반도 전국 곳곳에서 정전 사태가 벌어져 전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와 함께 그동안 제난관련 시스템에 문제가 되었던 부분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중 이번 대정전과 관련 정전을 초래한 전력거래소 측이 ‘전력시장운영규칙’을 어긴 것으로 드러났다. 전력시장운영규칙은 전기사업법에 근거를 두고 전력거래소가 만든 규정을 망라한 일종의 ‘바이블’이다.

이 규칙의 ‘경보발령 절차’에 따르면 전력거래소 중앙급전소장은 경보발령 요건 발생 시 전력수급상황 및 경보발령 단계를 작성한 뒤 지경부 장관과 경보발령권자(전력거래소 운영본부장)에게 보고하고 경보를 발령하게 돼있다.이어 전기사업자, 다시 말해 한전과 발전자회사 등에 해당하는 송전, 판매, 발전 사업자에게 이를 통지한다고 규정했다. 규칙은 결국 의사결정 프로세스 상으로 전력거래소가 전력위기에 닥쳤을 때 지경부 장관의 ‘OK’를 받아 경보를 발령하고 필요한 대응조치를 내려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규칙뿐 아니라 ‘전력위기’ 대응 매뉴얼에는 경보 단계에 따른 대응 조치들이 담겨있는데, 전날 단행된 제한 송전은 예비전력이 100만㎾ 미만이었을 때 가능한 조치였다.따라서 규칙과 매뉴얼대로라면 ‘선(先)조치-후(後)보고’가 아니라 사전 보고에 이은 실행을 택했어야 맞다는 얘기다.지경부는 이에 대해 전날 배경을 설명하면서는 정확하게 매뉴얼대로 하지는 못했다고 해명하면서도 이 규칙의 해당 규정은 언급하지 않았다.

또 지경부 장관에 보고를 명시한 대목은 거론하지 않고는 전력거래소가 지경부와 협의하게 돼있다는 설명만 곁들이면서 그것이 지켜지지 못해 유감이나 “워낙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수요 예측이 불러온 위기 초래와 대응 과정에서 지경부가 느슨한 대처와 전력거래소의 보고도 없이 순환 정전(단전)을 판단, 이에 맞물려 한전이 지역별로 예고도 없이 과도하게 단전 조치를 단행에 대해 책임 소재논란이 있을 예정이다. 시민 불편과 산업계 피해를 낳은 데 대한 들끓는 비판여론 때문이다.

한국전력 만든 ‘전력 수급 비상 상황 매뉴얼’도 탁상용
반면 관련전문가들은 한국전력이 만든 ‘전력 수급 비상 상황 매뉴얼’ 또한 실제 비상 상황에선 통하지 않는 ‘탁상용’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홍익대 전자전기공학부 전영환 교수는 “한마디로 매뉴얼이 적용될 수 없는 현실”이라며 “아직까지 한번도 이런 수급 비상 상황이 발생하지 않아 이런 매뉴얼이 잘못됐다는 지적도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주요 골격이 수십 년 전에 만들어져 바뀐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선로 상황상 선별적으로 특정 시설만 전원을 차단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하나의 전기 선로는 적게는 100여 가구, 많게는 4000~5000가구에 전기를 공급한다. 한 선로에 포함된 시설인 이상 따로 전기를 차단할 수 없다. 그래서 주택가 전기를 끊으면 일대의 병원·관공서·은행도 다 전기가 끊기는 것이다. 전기 차단 순서를 정해놓은 매뉴얼 자체가 무용지물인 셈이다. 비상 상황에서 예비 전력량에 따라 ▲발전기 추가 가동 ▲발전기 복구 가동 등의 조치를 단계별로 취하게끔 해 놓은 매뉴얼도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나온다.

   
9월 15일 처럼 전기 소비량이 수직으로 치솟는 상황에선 몇 분 또는 몇 초 안에 예비 전력이 바닥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원대 에너지IT학과 김창섭 교수는 “지식경제부 보고를 하느라 순환정전을 미뤘다간 전국적 정전 사태를 불렀을 수 있다”며 “신속하게 순환정전 지시를 내린 전력거래소의 결단이 오히려 맞다”고 주장했다.

매뉴얼엔 전기를 차단할 땐 시설 특성에 따라 짧게는 1~2시간 전에, 길게는 하루 전에 예고하도록 돼 있지만 누가 어떤 방식으로 예고해야 하는지는 없다.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도 9월 16일 국회 상임위에 출석해 “정전 사실을 방송사에 알리는 문제는 매뉴얼에 명쾌하게 안 돼 있다”고 말했다. 전력거래소 염명찬 이사장도 16일 기자간담회에서 “민간 주택의 전기를 먼저 차단하도록 한 지금의 매뉴얼은 옛날 식”이라고 말했다.

손해배상 문제도 관심대상
15일 발생한 대규모 정전사태로 피해가 속출한 가운데 정전으로 인한 손해배상 문제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국전력공사의 직접적인 책임으로 정전사태가 발생했는지를 입증하는 것이 관건이다. 실제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지난 15일 발생한 사상 초유의 정전사태에 대한 집단 손해배상소송을 추진 중이다. 경실련은 9월 16일 성명을 통해 “정전사태의 피해자를 모집해 한국전력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경실련은 이어 “단전사태로 피해를 본 국민이나 기업을 대상으로 정신적 경제적 피해에 대한 구제절차의 마련과 적정한 보상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경실련은 그러나 “향후 정부와 한국전력의 조사결과와 피해보상을 지켜보면서 국민들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보여주지 못할 경우 집단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라고 밝혀, 곧바로 소송에 나서진 않을 전망이다. 상당수 법률전문가들은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할 경우 배상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지경부가 긴급브리핑에서 수요예측을 하지 못한 부분을 시인한 만큼, 한전의 책임을 입증할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한 법률전문가는 “한전의 과실로 정전된 만큼 책임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재경지법 관계자는 “한전의 직접적인 책임을 규명하는 것이 관건”이라면서 “한전이 전력수요를 예측하지 못한 것을 업무 소홀로 본다면 피해배상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전 관련 소송에서 한전이 패소한 사례가 드문 만큼 배상이 어려울 것이란 관측도 있다. 2003년 9월 태풍 ‘매미’ 때 닷새간 정전으로 피해를 입었다며 경남 거제지역 주민 7212명이 제기한 소송에서도 한전이 승소하기도 했다. 당시 재판부는 한전의 과실이 아닌 천재지변으로 판단했다. 지난 1월 여수산업단지 정전사고의 경우에도 정부 합동조사단은 “사전적으로 대처하기 어려웠으며, 기술적 한계에 의해 발생한 사고”라면서 한전의 책임이 없다는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전정사태와 관련해 피해보상 방안 발표
한편 정부는 이번 발생한 초유의 정전사태와 관련해 피해보상 방안을 발표했다. 9월 18일 지식경제부는 직접 피해를 입은 제조업체, 상가 및 일반 소비자 등에 대해 개별 피해사실 조사를 통해 보상하겠다고 밝혔다.이번 피해보상위원회는 소비자단체, 중소기업중앙회, 회계사 및 변호사 등 전문가, 한전 및 전력거래소 등으로 구성돼 정전피해 유형·업종·구체적 피해보상 기준 및 조사절차 등을 마련된다. 피해신고센터는 전국 189개 한전 지점, 한국산업단지공단, 중소기업진흥공단 및 각 지역본부, 전국 소상공인 지원센터로 구성됐다.

정부는 피해보상위원회가 정립한 ‘정전피해보상지침’에 따라 보상을 실시하되, 이견이 있는 경우에는 피해보상위원회에 상정해 심의 후 보상할 방침이다.한편 부처 합동점검반을 구성한 정부는 이번 정전사태의원인과 관련해 1차 조사결과로 전력거래소에서 정전 당일 사용하기 곤란한 전력공급량을 사용가능한 예비전력량에 포함, 지경부에 허위보고했다고 밝혔다.

지경부는 이같은 허위보고가 관계 기관의 긴급 공조 차질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분야별 전문가로 구성된 합동점검반은 ‘전력위기 대응체계개선 테스크포스(TF)’를 구성해 ▲보고체계 개선 및 관계기관 공조 방향 마련 ▲위기대응 매뉴얼 개선 ▲수요예측 및 계획정비 개선 ▲현 전력산업 시스템의 효율적 작동 여부에 대한 점검 및 개선의 대책을 내놓았다.

재난전문가 예고된 인재
한편 재난전문가들은 이번 정전을 예고된 재난이었다고 말한다. 이미 올해 초 전력수요가 사상 최대로 치솟아 예비전력이 위험수위까지 떨어지는 등 대규모 정전사태에 비상등이 켜진 상황이었다.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7월 에너지 절약을 호소하는 대국민 담화문까지 발표했다. 전력 전문가들도 이미 지난해부터 대규모 정전사태를 경고했다. 그런데도 수급(需給) 관리에 실패했다.

   
이근대 에너지경제연구원 전력정책연구실장은 “지금껏 정전이 없었던 게 오히려 운이 좋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원가에 못 미치는 전력요금으로 전력소비를 적절히 조절하지 못한 영향이 컸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2008년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1달러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데 0.580kWh의 전력을 사용한 반면 우리보다 경제규모가 3배 큰 일본은 달러당 0.206kWh의 전력을 쓰는 데 그쳐 한국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8월 1일부터 전력요금을 평균 4.9% 올렸지만 여전히 생산원가에 미달하는 수준이었다. 범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강력한 물가안정 대책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전 관계자는 “정부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전력요금에 민감한 국민정서를 고려한 측면도 있었다”고 말했다. 최소 3∼4년이 걸리는 화력발전소 건설공사 기간을 감안할 때 정부가 장기 계획에 따라 발전규모를 제때 늘리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발전소가 들어서기로 예정된 지역의 반발이 심해지자 이를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영향도 있다.  한 에너지 전문가는 “후쿠시마 원전사태로 원자력발전소 용지 선정이 한계에 부닥친 데다 신재생에너지의 에너지 효율이 크게 떨어지는 것도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대규모정전사태를 미리 예방할 수 있는 관련 전문가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전문적인 재난관련 전문가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에너지 전문가는 “후쿠시마 원전사태로 원자력발전소 용지 선정이 한계에 부닥친 데다 신재생에너지의 에너지 효율이 크게 떨어지는 것도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대규모정전사태를 미리 예방 할 수 있는 관련 전문가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전문적인 재난관련 전문가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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