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조 높은 화엄사의 미학
화엄사는 절터로서 천년만년을 기다려온 땅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좋은 터에 각황전·대웅전 등 아름다운 절집들이 자리 잡고, 각황전 앞 석등과 사(사)자석탑 같은 빼어난 석탑들이 세워져 격조가 한껏 높아졌다. 이들 조형물은 곡선미를 띤 푸른 소나무의 선(線)과 어울려 자연스러움을 더한다.

	한 겨울 지리산의 나목들.

화엄사를 관람함에 있어서 앞뒤로 펼쳐지는 지리산 줄기의 흐름을 보지 않는다든가, 건물과 탑을 보되 주변의 청신하고 유연한 소나무의 미학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화엄사를 반쪽밖에 보지 못한 셈이 된다.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한 솔숲 길을 걸으면서 지리산과 행복하게 조화를 이룬 화엄사를 떠올린다. 지리산과 화엄사를 생각하면서도 자연의 흐름에 역행되지 않는 것이 선(禪)이고 진리(眞理)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능선 길을 걷다보면 화엄사에 딸린 산중암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려오곤 한다. 연기암이 내려 보이면서 차일봉도 가까워진다. 울창한 솔숲 속에서도 한 그루의 낙락장송이 고고하고 우아함을 잃지 않고 있다. 혼탁한 세상을 살면서도 속세에 때 묻지 않은 올곧은 선비를 보는 듯하다. 차일봉 직전 전망바위에 서자 고즈넉한 화엄사와 넓은 구례들판, 그리고 굽이도는 섬진강의 유유한 흐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원사봉에서 올라오는 산줄기가 꿈틀거리며 올라온다. 차일봉(1008m)에서는 종석대와 노고단이 가깝다. 종석대 8부 능선쯤에 둥지를 튼 우번암은 나무위의 새집처럼 포근해 보인다. 지리산에서는 보기 드물게 길게 이어졌던 솔숲은 차일봉을 지나면서 활엽수림으로 바뀐다. 산비탈의 잿빛 나무와 하얀 눈이 대비를 이룬다. 우번암 삼거리에서 곧바로 코재로 가지 않고 우번암으로 향한다.

섬진강으로 향하는 능선들
무뚝뚝한 바위로 이루어진 종석대에서의 조망은 실로 감동적이다. 노고단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만복대·고리봉·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이 유장하게 펼쳐진다. 반야봉이 노고단 옆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고, 차일봉능선·월령봉능선·왕시루봉능선이 섬진강을 향하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섬진강 너머에서는 광양 백운산이 우뚝 서 있다.

	독특하거나 빼어난 장관은 아니지만 고요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월령봉 능선의 주변 전경.

무등산을 비롯하여 화순의 백아산·모후산, 순천 조계산 같은 산들도 산 그림을 그린다. 노고단대피소에서 점심을 해결한 후 도로를 따라 송신소로 오르다가 송신탑 100여m 직전에서 오른쪽 울타리를 넘는다. 작은 암봉으로 내려오니 남쪽으로 길게 이어진 월령봉능선이 내려보인다. 길은 처음에는 희미했으나 월영봉능선에 접어드니 확실해진다.

숲길이 이어지다가 종종 바위지대가 나타나기도 한다. 섬진강을 향하여 남쪽으로 고도를 낮추며 달려가는 차일봉능선과 왕시루봉능선이 양쪽에서 호위를 한다. 노고단과 종석대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든든해한다. 문수골의 최상류인 전도사골도 바로 아래에 와 있다. 활엽수 일색의 숲에는 가끔 무릎 높이의 산죽이 물기를 나그네의 바지와 신발에 털어놓기도 한다. 왕시루봉능선 질매재 너머로 보이는 반야봉에는 구름이 살짝 덮여 있다. 밤재로 내려섰다가 올라서니 형제봉(912m)이다.

형제봉에서 사방을 둘러보자 반야봉과 노고단, 종석봉을 비롯한 주변의 여러 봉우리와 능선들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것 같다. 화엄사골과 문수골을 가볍게 덮고 있는 운해(雲海)가 지리산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형제봉의 또 다른 봉우리에서는 지리산의 육중한 풍경과 유연하게 흘러가는 섬진강, 넓은 분지를 이룬 구례들판이 조화를 이룬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과 호형호제하는 백운산이 반갑게 손짓한다. 삼각점이 있는 월령봉(749.6m)에 오르자 섬진강과 백운산이 운무와 함께 춤을 춘다. 소나무 일색의 솔숲 길은 동네 뒷산 같아 푸근하다. 어느덧 산줄기는 섬진강으로 스며들고, 우리의 긴 산행도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