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그대로 후덕한 산, 광덕산을 찾으며 여유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한다. 욕망과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산처럼 산다는 것이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다. 꾸준한 자기성찰을 통해 산을 닮아가는 일이 중요한 이유이다. 광덕산을 찾을 때, 항상 광덕사 쪽에서 올랐는데 이번에는 강당사 방향을 택한다. 낯익은 외암리민속마을 앞을 지나 강당리 골짜기로 들어선다.

조선 숙종 때 외암 이간이 후학을 가르친 강당(講堂)이 있던 곳이라 하여 강당리라 부르는 마을이다. 대원군이 섭정을 할 때 서원철폐령이 떨어지자 잽싸게 공주 마곡사의 불상을 업어다가 사찰로 가장한 것이 오늘날의 강당사가 되었다. 강당골주차장에 도착하자 운치 있는 노송과 맑은 물이 그윽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정갈하게 분포되어 있는 적송 숲은 한국적인 미를 자랑한다. 은은하게 다가오는 솔 향이 내 가슴에 스며든다. 소나무 사이로 강당사도 내려보인다.

충청도 사람처럼 부드러운 산세
우리나라 고유 수종인 적송(赤松)은 우리 토양에 잘 맞을뿐더러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모양을 갖추고 있어 누구에게나 정감을 준다. 적송 일색의 숲은 종종 활엽수에게 자리를 내주기도 한다. 광덕산으로 오르는 길은 산세도 부드럽고 흙길이 계속 이어져 한없이 푸근하다.

마지막 급경사를 오르자 광덕산이다. 그러나 오늘은 날씨가 잔뜩 흐려 주변의 풍경을 충분히 감상할 수 없다. 아산·천안뿐만 아니라 서산·당진·평택, 심지어 대전 근처까지도 조망할 수 있지만 오늘은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망경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설화산으로 꿈틀거리며 달려가는 산줄기가 자연스럽다. 광덕산 정상에서는 광덕사와 강당골 양쪽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장군바위를 향하여 능선 길을 걷는다. 흙에서 올라오는 기운이 내 가슴을 행복하게 해준다. 만물을 소생하게 만드는 흙이 사람에게도 생명력을 불어넣어준다. 5m 높이의 장군바위를 만난다. 옛날 허약한 젊은이가 깊은 산 속을 헤매다가 기아와 갈증으로 사경에 이르렀는데 어느 곳에선가 물소리가 들려와 소리 나는 곳을 가보았더니 큰 바위 밑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더란다.

그 물을 손으로 받아먹었더니 몸이 장군처럼 우람하게 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장군바위라 불리게 되었다. 장군바위에서는 광덕사와 강당골로 곧바로 내려가는 길이 갈리고, 2~3분 올라가면 부용묘를 거쳐 광덕사로 가는 길이 갈린다.

수많은 인재 배출한 설화산
장고개를 지나서도 급하지 않은 능선이 오르락내리락한다. 망경산과 설화산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서 우리는 설화산 방향을 택한다. 고도가 점차 낮아지면서 활엽수 일색의 숲은 솔숲으로 다시 바뀐다. 임도를 지나 묘지가 있는 곳에서 마지막으로 강당골로 내려가는 길과 헤어진다. 이곳에서 날등을 타고 30여분 내려가면 강당골주차장에 닿는다. 부드러운 흙길에 솔 향 그윽한 길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오른쪽에서는 망경산과 태화산이 변함없다. 앞에서는 설화산이 뾰족하다. 설화산 직전 봉우리에 올라서자 지금까지 걸어왔던 능선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주변의 다른 산은 충청도 산답게 부드러운 육산인데, 설화산은 뾰족하게 솟은 암봉이다. 이런 봉우리를 주로 필봉(筆峰)이라 부는데, 필봉 아래 마을에서는 문필가가 많이 배출된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설화산을 문필봉(文筆峰)이라고도 부른다.

	설화산의 정기를 받은 외암리민속마을, 옛날 양반집과 평민의 집들이 길 사이로 옹이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정겹다.

설화산 서쪽의 중리는 조선조 세종 때 좌의정까지 지낸 맹사성을 비롯한 여러 학자를 배출하였고, 남쪽의 외암리에서도 이간선생을 비롯하여 학자들을 많이 낳은 곳이다. 저 아래 송악면 소재지에서 보면 독수리가 비상하는 것 같다는 설화산의 기운은 예사가 아니다.

이런 봉우리를 보고 오르면서 맹사성은 곧고 청렴한 인품을 갖추었는지 모른다. 돌담길과 고택들이 옛 정취를 듬뿍 풍기는 외암리민속마을로 내려선다. 옛날의 양반집인 기와집과 평민, 하인의 집인 초가집들이 어깨를 나란히 기대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정겹다. 마을을 설화산이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강당골에서 흘러온 내가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아름드리 적송과 600년 된 느티나무의 운치는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외암리 마을은 조선조 명조 때 장사랑이던 이정(李珽) 일가가 낙향하여 정착함으로써 예안 이(李)씨 세거지로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정의 6세손인 이간(李柬)이 설화산의 정기를 받아 호를 외암(巍巖)이라 지은 뒤에 마을 이름도 외암리로 부르게 되었는데, 뒤에 한자표기만 ‘外岩’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외암리도 해가 갈수록 옛 맛을 잃어가고 있으니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옛집들이 낡고 허물어져 복원한 초가들이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다. 그러나 끊어질 듯 이어지며 구불구불 돌아가는 돌담길을 걸으며 슬쩍슬쩍 옛집을 바라보는 마음이 인심 좋은 아낙의 마음처럼 따스하기만 하다.